제주 4·3 학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민란 사건입니다. 이는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로 시작되었으며,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제주도는 서울의 딱 세 배 큰 섬입니다. 제주 4·3 학살은 제주도 극히 일부의 해안가를 제외하고 모조리 초토화되어 버린 사건으로 유명한데요. 제주도 내 마을은 몽땅 불타 버리고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이후 불문 학살 당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4월 3일. 제주도에는 태극기 대신 성조기가 올라가고 친일파와 같은 미로 태세가 형성되었습니다. 제주도의 항플 관덕정 앞에는 3만여 명의 주민이 모여들었습니다.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 때문이었는데요. 그러나 집회 자체는 문제없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경찰이 타고 지나가던 말에 어린아이가 죽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무심코 사고를 무시한 채 가버리는 경찰에게 사람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경찰이 발포하면서 주민 6명이 죽었습니다.
이는 군사적 충돌과 대규모 민간인 희생 으로 이어졌는데요. 처음에는 경찰에 항의하는 의미로 학생은 학교를 안가고 버스기사도 일을 멈춰 버스도 안 다니고 공무원과 일부 경찰도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무려 제주도 직장의 95%가 참여한 민관 합동 총파업이 벌어진 것입니다. 미군은 그날을 필두로 제주도를 '좌익 본거지'로 규정했습니다.
원래 제주도는 화산섬이었던 탓에 땅이 너무 촉박해서 모두가 하나같이 가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항상 과도한 압박을 받았고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모두 상황이 참담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과는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도망치거나 떠나는 섬이었습니다.
그래도 해방이 되자 뜻 있는 청년들이 제주도를 제대로 살려보기 위해 자치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해방 직후부터 미군정과 충돌했던 다른 지역과 달리 오히려 원만하게 공존하고 있었다가, 이 파업으로 인해 좌익으로 낙인찍히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경찰과 함께 악명높은 청년단이 계속해서 제주로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이 섬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5명 중 1명의 제주 사람은 빨갱이다'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제주도의 경제와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고 지원하는 것보다는 규정하고 이용하려 들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결국 1948년 4월 3일 새벽, 정부는 사태 진압을 위해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지역에 초토화 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중산간 마을의 95%가 소각되고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단 이틀 만에, 3,400여 명이 죽고 없어져 버렸습니다.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빨갱이'로 몰릴까 두려워, 묻어두었던 수십 년 세월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이 사실을 잘 모릅니다.
제주도는 그 어떤 곳보다도 특별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자연과 독특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제주도의 아름다움과 그 역사를 함께 이해하고 소중히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곳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어두운 역사도 함께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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