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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식이삼촌 -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추천 - 줄거리 결말 한국의 근현대사 3.15 부정선거 4.19 혁명 5.16 군사정변까지

by 아셀acell 2024.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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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식이삼촌은 디즈니플러스에서 나온 상반기 신작이었는데요. 얼마전 마지막화까지 줄거리가 다 나왔습니다.


배경은 1950년대 후반, 1960년대 초반으로 3.15 부정선거 전후부터 5.16 군사정변 이후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정치인들이나 군인들 위주가 아닌 삼식이삼촌 위주의 이야기였죠.


드라마의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인 315 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우리나라에서 실제 치러진 선거이자 부정선거가 맞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3.15 의거와 4.19 혁명이 발발하게 되었죠.





✔️ 3.15 부정선거


이 선거 직전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장면이 이겼었는데, 이번 선거에도 그렇게 된다면 이승만이 이제 나이가 있기 때문에, 대통령 임기 중 사망할 시 대통령직이 민주당 소속 부통령에게 승계된다는 것을 우려한 자유당에 의해 이 부정선거가 자행되게 되었습니다.


1956년에 치러진 이전 대선에서 이승만은 라이벌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유세 중 병사하는 개인적 호재에도 불구하고 본인 아래에서 장관직을 역임하여 농지개혁을 주도한 진보당 조봉암에게 30% 가량의 득표율을 내주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게됩니다.


당시 결과는 이승만 약 500만 표, 조봉암 약 220만 표로, 투표 당시 사망 상태였던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가 약 185만 표나 나오는 놀라운 결과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국부로서 존경받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이승만은 상심을 했다고 하는데요. 대중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더 열심히 보고 일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으면서 상심했다고 하는게 너무 우습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그렇게 많은 책임을 지는 자리는 다들 안하겠다고 하거나, 정말 열심히 목표를 가지고 있는 깨어있는 사람이 하는게 보통이라고 생각하는데, 너도나도 하겠다는 걸 보면, 얼마나 책임은 생각안하고 떨어질 콩고물만 기대하며 그 자리를 노리는지 짐작할 수 있는 바입니다.


당연히 이승만에게 아부하기 바쁘던 자유당과 아첨꾼들은 대선이 끝나자마자 다음 대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불리해진 전황을 뒤집어 보고자 일단 인기가 많았던 조봉암을 사법살인으로 죽였는데요.


여기서 1958년 1월, 조봉암이 간첩 행위를 하였다는 혐의로 진보당은 강제해산당하고 당수 조봉암이 사형을 당한 사건은 제1공화국에서 일어난 사법살인 사건이자 조작극이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크게 퇴보시킨 사건이었습니다. 발견된 소련 문서대로 조봉암이 정말 김일성의 간첩이라고 한들 법정에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유죄추정의 원칙을 사용해 불법으로 정당을 해산하고 유죄 판결을 내린 뒤 정치깡패와 경무대의 권력을 동원하고 3권 분립을 무력화하여 결국 조봉암을 사법살인에 이르게 한 일련의 행태 때문이었죠.





이는 삼식이삼촌에서 나온 인물 주인태를 생각나게 하는데 실제로 주인태의 모티브가 조봉암이라고 하더라구요. 주인태는 민족 번영과 평화 공존을 주장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조봉암처럼 높은 지지를 받는 혁신계 정치인이었으며, 대선 출마를 결심하고 현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는 중심 인물이자, 김산의 은사로 김산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김산은 주인태의 딸인 주여진과 교제하기도 했는데요. 이후 삼식이 삼촌을 만나 그의 뜻대로 움직이면서 절대 헤어지지 않겠다던 주여진과도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주인태는 간첩 누명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죽은 그에게 삼식이삼촌이 간첩 누명을 씌웠고 그를 포함한 그의 당과 또 쳐내야 하는 일부 군인들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판을 조작하려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편 실제 역사속에서 자유당은 자유당 정권의 처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던 언론(특히 경향신문)에 재갈을 물리는 신 국가보안법을 발동시키고, 민주당이 아직 대통령 후보조차 정하지 못하고 내부 갈등으로 갈팡질팡하던 1959년 3월부터 이미 새로 내무부장관이 된 최인규의 지도 하에 부정선거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습니다.


최인규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최전선에 항상 있었습니다. 그는 내무부장관 취임식 연설에서 '모든 공무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기필코 자유당 후보가 당선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이승만의 집권을 위해 앞장섰죠.


그는 전국 시, 읍, 면, 동에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해 매주 1회씩 모여 득표 공작을 점검하고 같은 해 5월부터 11월까지 서울, 인천, 대전, 춘천, 대구, 광주, 부산 등지를 순회하면서 공무원들에게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측 후보자가 당선되도록 적극 노력할 것을 지시할 정도였습니다.


지금 같아서는 당연히 공무원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고 강요하는 것이 안될일이었지만 민주주의 초기였기에 가능했던 얼레벌레 우당탕탕 시스템 중 하나였던 셈이죠.


그는 심지어 군수 및 경찰서장들과의 모임에서 "어떠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 역사상 대통령 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 놓고 보아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 국가대업 수행을 위하여 지시하는 것이니 군수 서장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 라고 말했을 정도로 권력을 위해 사는 아첨꾼이었습니다.





삼식이 삼촌에서는 최민규가 이런 역할을 맡아 연기했는데요.


드라마 속 최민규는 내무부장관으로 자유당 정권의 부역자로, 현실의 최인규와 달리 유약한 소인배, 아첨꾼이 아닌, 선거를 이용하여 권력을 차지하려 하는 주도면밀한 모습을 지닌 악독하고 삼식이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로 나왔습니다. 사실상 이름과 지위만 빌려서 드라마가 새로 창작한 인물이라고 하네요.


당시 제시된 구체적인 부정선거 행동지침으로는 4할 사전투표, 3인조 5인조 공개투표, 완장부대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등이 있었는데요.


4할 사전투표란 선거당일 자연 기권표와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든 전체 유권자 4할 정도의 표를 미리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투표함에 넣어두는 부정선거 방식입니다.


3인조 5인조 공개투표는 미리 짜둔 3인조, 5인조 별로 조장의 확인 아래 투표하여 자유당 선거위원에게 보여준 다음 투표함에 넣도록 하는 방식이었죠.


완장부대 활용은 자유당 완장을 찬 사람들을 여럿 투표소 주변에 배치시켜 심리적으로 압박하여 자유당에게 투표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었는데요.


이뿐 아니라 야당 참관인 축출을 통해, 민주당 측 참관인을 매수해 참관을 포기시키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구실을 붙여 투표장에서 축출해버렸습니다.





자유당 정부는 대통령과 부통령 모두에 대한 부정 선거를 시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죽음으로, 부통령 선거에만 부정 선거를 동원했습니다.


거기에 1960년 2월 3일, 정부는 선거를 기존의 5월에서 두 달 앞당긴 3월 15일에 치르기로 발표했는데요. 농번기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라지만 애초에 과거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 모두 농번기인 5월에 치러졌던 점, 그리고 당시 이승만의 유력한 대항마로 주목되던 야당의 조병옥 후보가 신병 치료차 미국에 가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야당 후보가 제대로 유세를 할 수 없는 틈을 노리려는 저의가 보였습니다.


"기왕 농번기를 피하려면 7월로 미루는 게 어떠냐"는 문제 제기도 있었지만 당연히 정부는 듣지 않았고, 조병옥도 선거가 갑자기 앞당겨졌다는 소식을 미국에서 전해 듣고서는, "등에다 대고 총을 쏘는 추잡한 정략"이라고 화를 냈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병옥 후보가 갑작스레 미국에서 병사를 하게됩니다. 이로써 사실상 대통령은 이승만의 당선이 확정되게 되었습니다.


물론 투표를 해서 전체 유권자의 30%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당선되도록 했지만, 아무리 여론이 안 좋아졌어도 이승만이 국부 버프를 받아 고정 지지층이 있다보니 30%를 못 받을 리는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부통령 선거만 부정선거를 치루기로 준비가 들어갑니다. 사실 부통령의 권한 자체는 크진 않았지만 당시 헌법 기준으론 대통령이 죽으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한다는 법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선거 당시 이승만이 워낙 고령이었기 때문에, 또 지난번 대선에서 자유당이 내세웠던 이기붕이 보기 좋게 민주당의 장면에게 박살났기 때문에 장면이 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승만이 임기 중 혹여 사망해버리면 그 즉시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자유당은 실각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통령 당선을 위해 준비했던 부정선거 계획은 자연스레 부통령 당선을 위한 것으로 대신 진행되었는데요. 자유당은 이승만 사후를 대비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내세웠는데, 여론은 이기붕에게 부정적이었습니다.


왜냐면 당시 이승만은 지금 봐도 장수했다고 할 수 있는 85세의 고령이었던 데다가 건강 상태도 안 좋아 보였기 때문에 정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거든요. 국민과 언론들의 여론도 이승만의 장기독재에 지쳐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국부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 인물이었고 낙선시켜 쫓아내기보다는 어차피 고령이고 임기 중 사망할 확률이 높으니 부통령에 장면을 당선시켜 정권교체를 유도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장면에게 우호적인 여론이 쏠린 것도 있었죠.


웃긴 것은 정작 이승만은 이 부정선거로 인해 쫓겨나긴 했지만 미국 하와이에서 1965년까지 살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대외 활동이 가능할 만큼 정정하던 이승만의 건강이 결정적으로 나빠진 것도 1964년 6월부터였습니다. 즉 대통령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쳤어도 1964년 봄이니까 부통령에 대권이 돌아가진 않았을 수 있었던 거죠.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결국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할 필요도 없었는데 괜히 일을 저질러 스스로의 멸망을 불러온 셈 입니다. 물론 이땐 이승만 본인도 자신의 남은 수명을 알 수 없었으니 여담일 뿐이지만요. 어쩌면 이승만이 5년을 더 산 것도 사실 대통령직을 내려놓고 하와이에서 쉬었기 때문인 것일수도 있구요.


아무튼 목표를 부통령으로 바꾸고 1년 정도를 기다리고 마침내 시작된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최인규를 비롯한 자유당과 그 떨거지들은 꾸준히 준비해온 자신들의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재를 위해 3.15 부정선거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자유당 정권은 부정선거자금 마련을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대출 커넥션을 동원했구요.


그 결과 1000만 환 이상의 선거자금을 바친 기업인들이 200여 명, 총액은 70억 환에 달했습니다. 또 도로사업비 등 정부사업예산에서 80억 환을 전용, 선거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선거 당일에는 앞서 말한 4할 사전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야당 참관인 쫓아내기, 3인조, 5인조 투표, 뇌물 살포 및 협박 외에도 밤중에 투표소에 몰래 잠입하여 투표 현장에 있던 투표함을 싸그리 바꿔 버리고, 대낮에 일부러 불을 끄고 정전드립을 치면서 어둠을 틈타 미리 준비한 투표함으로 바꿔치기도 했습니다.





또 매수된 검표원이 야당 후보를 찍은 표를 보면 책상 아래에 떨어뜨린 척 하며 책상 아래로 들어가 양 손가락에 지장을 듬뿍 찍은 채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사정 없이 찍어서 무효표로 만들기도 하고, 다른 후보를 찍은 표 뭉치 위아래에 한 장씩 이기붕의 표를 씌운 후 모두 이기붕의 표로 집계했으며 아예 검표하지도 않고 몽땅 이기붕의 표로 집계하는 무식한 방법을 쓰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되었습니다.


문제는 선거 조작을 너무 열성적으로 한 나머지 이기붕의 득표율이 99%를 찍고 일부 지역은 총 유권자를 넘긴 115%를 달성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는데요.


그래서 이에 당황한 정부가 반발을 우려해서 "야, 너무 많다. 줄여, 줄여." 라고 지시를 내려 이기붕의 득표율을 70%로 줄여서 발표하는 말도 안 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국민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뭔가 이상함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고 바로 선거 당일부터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경찰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를 낸 이 시위는 다른 지역 시위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 4.19 혁명


1960년 3월 15일 오전 10시 30분경에 이루어진 민주당 마산시당의 선거 포기와 무효 선언은 경남도당의 선언보다 3시간, 중앙당보다 6시간 앞선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후 2시경, 민주당 마산시당 당사 앞에서 불종거리까지 시민들이 운집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당 창원을 지구당 선거부장 장복열이 앞장서서 “3.15는 부정선거다!”, “협잡선거 다시 하자!”는 구호를 외쳤고, 이어 1500여 명의 시민과 학생이 합류했습니다.


오후 2시 30분경,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정남규 도의원이 마산 지역 민주당원들에게 길거리를 걸으며 시위하도록 지시했고, 이에 따라 강경술, 강선규, 황칠규, 정경도, 정진철 등 시당 간부 30명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 행진을 벌였습니다. 오후 3시 40분경, 도의원 정남규와 30여 명의 민주당원이 시위대에 합류했고, 시위대는 불종거리, 창동, 부림시장, 남성동 파출소, 서성동 어업조합을 돌며 구호를 외치고 평화적으로 행진하는 가운데, 시위대는 수천 명으로 불어나게 되어었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마산 시내의 가두행진이 계속되자 경찰은 시위대를 강제 진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도의원 정남규, 부위원장 강경술, 상무위원 황칠규, 감찰위원장 정경도, 당원 정진철, 박주복 등 민주당 간부 6명이 연행되었고, 5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 군중은 남성동 파출소와 자유당 마산시당으로 달려가 투석전을 벌이며 경찰 및 반공청년단과 대치했습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 당일, 낮에 시작된 마산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낮 시위를 주도한 민주당 당직자들에 대한 경찰의 폭행과 체포가 있은 뒤, 시위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7시가 되자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는 다시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몇몇 청년의 주도하에 남성동 파출소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수백 명의 군중이 돌멩이와 막대기 등 손에 잡히는 것들을 파출소를 향해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8시 이후부터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의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 1명이 쓰러졌고, 흥분한 시위 군중은 파출소로 밀어닥쳤는데요. 당황한 경찰들은 옆 창문을 통해 피신했고, 파출소를 완전히 장악한 군중은 사무 비품, 집기류 등을 부수고 각종 서류와 공문서들을 찢고 내던져 버렸습니다.


이후 시위대는 남성동 파출소에서 마산시청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대로에는 1만 명에 가까운 인파로 가득했고, 시위를 주도하는 청년, 학생들은 경찰이 시위대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불이 켜진 건물을 향해 “불을 끄시오!” 하고 경고했습니다. 암흑으로 변한 시가지에서 시위대는 자유당 마산시당 사무소, 국민회 마산지부, 서울신문사 마산지사 건물 등을 부수기도 했습니다.


3월 15일 ‘밤시위’는 학생보다 시민, 특히 도시 하층민의 참여가 두드러졌습니다. 일례로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의 ‘귀환 동포’가 다수 거주하던 신포동에서는 품팔이, 부두노동자, 구두닦이, 넝마주이, 홍등가 여성 등 도시하층민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1960년 3월 15일 마산 밤시위는 시내 곳곳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신마산 쪽에서는 변절자로 지목된 국회의원 허윤수의 집과 마산시장 박영두의 집이 파괴되었습니다. 특히 허윤수의 가옥은 시민들에게 완전히 파괴당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시민은 분뇨를 끼얹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녁, 밤 사이 경찰의 실탄 사격도 있었지만 시위 군중도 파출소를 포위하고 경찰에게 투석하는 등 대치가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새벽이 되면서 상당수 청년,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시위대는 절반 이상으로 줄었습니다. 끝까지 남은 직업소년과 청년들이 경찰에 포위된 뒤 격투 끝에 체포되면서 격렬했던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의 항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요.





이때 경찰에 체포된 시민들은 남성동 파출소와 마산시청 지하실에 임시 구금되었고, 그곳에서 경찰과 정치깡패들에게 고문을 당했습니다. 당시 고문은 일제시대 고문과 동일한 구타와 물붓기, 매달기, 지지기와 같은 잔인한 고문이 행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1960년 3.15마산의거는 막을 내렸지만 의거 직후 실종되었던 김주열이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이 소식은 그날 《부산일보》 허종기자의 기사를 시작으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곧바로 마산에서 시위가 재개되었고(4.11제2차마산의거), 이는 4월 19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서울은 계속해서 시위가 일어나고, 이로인해 대한민국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그 사이 1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게 드라마에서는 잘 표현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단 3.15 부정선거 - 4.19 혁명 - 이승만 대통령 하야 - 허정 과도내각 수립 - 개헌 - 총선 - 장면 내각 수립이라는 엄청난 일들이 1960년 한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벌어졌으며,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대한민국의 큰 혼란이 초래된 상태였습니다.




✔️ 5.16 군사정변


그리고 당시 대한민국 국군에는 이승만 정부 때부터 군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비리, 승진가도 중단에 불만을 품고 4.19 혁명 이후 정군 운동을 벌여 미국과 충돌했던 일군의 장교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육군 소장 박정희와 1961년 2월 강제 예편당한 김종필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을 중심으로 한 장교들은 이로 인해 1961년 5월 말 강제 예편이 예정되었고, 이에 비밀리에 쿠데타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등은 이승만 정부 때 쿠데타를 하려 했으나, 4.19로 무산됐다가 다시 진행하게 된 것인데요.


삼식이삼촌에서도 육군사관학교 8기생을 중심으로 모인 혁명군의 쿠데타가 김산, 삼식이 삼촌, 장한민, 최한림장군의 쿠데타를 그대로 베껴, 더 먼저 일어나, 성공하게 되는데 이것이 5.16 군사정변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쿠데타 세력은 예비 사단 병력과 포병단, 해병대와 육군 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하여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을 비롯 대구시, 부산시 등의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하였고, 주한미군과 주한미국대사관의 공식적인 반대 성명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장도영과 통수권자 대통령 윤보선을 회유함으로써 국무총리 장면을 사퇴시키고 봉기 60여시간 끝에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쿠데타 세력은 불법적인 수단으로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탈취하여 앞으로 자신들이 조직한 소위 군사혁명위원회가 대한민국의 모든 통치권을 행사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6·25 발발 당시 95,000명 규모였던 한국군은 6.25를 치르며 휴전 당시에는 49만 2,000명으로, 그리고 당시에는 70만으로 급팽창했는데, 이 와중에 한국군 장교들은 미군들로부터 새로운 군사 지식과 과학기술을 습득했으며, 고급 지휘관들을 선발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미군식 선진 행정 시스템을 겪은 그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행정업무 방식을 가진 당대 정치인이나 공직자들과 부딪혔을 것은 쉬이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당시 육군 장교들의 사정을 보면, 6.25 전쟁 이후 조직이 비대해지고 인사적체가 발생하면서 승진이 막혀버린 육사 8기생 등 중견 장교들의 불만이 극심했습니다. 네. 결국 승진의 문제였죠. 더 나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진급은 적체되고,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친구가 참모총장이 되는 동안, 나는 만년 중령 신세고 하다보니, 불만이 쌓일대로 쌓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군인들은 당시 사회상에 비하여 비교적 우수한 시스템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대접 자체는 매우 박해서 군인 월급으로는 일가족이 건사하기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부정부패, 물자 횡령과 뇌물이 성행했고, 당시 군사 파벌의 독식 및 경쟁이라는 막장스러운 상황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1960년 3.15 부정선거가 터지자, 박정희는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신이 집권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포항에 주둔한 대한민국 해병대 제1사단장인 해병소장 김동하 장군과 공모하여 5월 8일에 쿠데타를 진행하기로 꾸몄지만 4.19 혁명이 터지면서 이는 잠시 멈추게 되었습니다.


박정희가 5월 8일을 쿠데타 날로 잡은 것은 5월 6일에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이 미국으로 해외 출장을 떠나기 때문이었는데요. 혁명 때문에 참모총장이 자리를 비우지 않게 된 것이죠.


박정희는 대외적으로는 4.19 혁명 이후의 사회 불안 때문에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부득이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해명했는데요. 실제로 부패한 정권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은 이승만 정권 이후 장면 내각에서도 지속되었고, 특히 50년대에는 군부대, 특히 육군 부대의 보급 물자 유출이 심해 겨울만 되면 동사자가 속출했습니다. 박정희가 맡은 사단은 동사자가 '적어서' 상부의 표창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에 미국은 이 사태가 공산주의 계열이 저지른 반역인 줄 알고 진압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지만, 미국의 반대와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친미 반공정책으로 무산되었습니다.


한편 5.16 정변의 소식을 들은 육군 보병대위 전두환은 정변이 누구의 주도로 이루어진지 며칠간 주도면밀한 조사 끝에 박정희와 그 측근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강영훈 당시 육사 교장에게 사관 생도들이 5.16 정변을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하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는 등 박정희에게 아첨하기 위해 애썼는데요. 결국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는 심복이 되어 12.12 군사반란을 저지르는 하나회를 조직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 이후는 이제 <서울의 봄>과 같은 사건들로 이어지지만 오늘은 다루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근현대사는 볼때마다 뭔가 다 비슷비슷한 놈들이 해먹는 느낌이 들어서 안타까운 느낌이 듭니다. 그래도 역사를 알아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보면 볼수록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해 반면교사가 되는 부분도 있어, 꼭 알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김산이 발표한 경부고속도로는 특히 실제로 우리나라 경제 고도 성장의 대표적인 상징물인데, 이런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기획이 진행되기까지 얼마나 치졸하고 정경유착적인 자전과 공전이 필요한지 보여주는 느낌이라 찝찝하기도 했습니다.


https://youtu.be/yGA7N2uaLKU




✔️ 삼식이 삼촌 결말 해석


그래도 마지막 결말해석에 대해 열린 결말이다 보니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 보였는데요. 제가 원하는 해석은 바로 삼식이 삼촌이 정치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고 일종의 은퇴를 하고 아마도 자신이 얘기했던 도피처 일본이나 그런 가까운 곳에서 김산의 성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 입니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일단 장두식 장군이 삼식이 삼촌과 친하기 때문인데요. 심지어 장두식 장군은 끌려가는 삼식이 삼촌을 보면 눈물을 흘리는 김산에게 괜찮다고 말했죠.




친한 사이인 삼식이 삼촌이 정말 죽을 거였다면 장두식 장군이 김산에게 괜찮다, 라며 그렇게 태연하게 말했던 것이 좀 이상합니다.


물론 장두식 장군이 삼식이 삼촌에게 삼식이 대신 김선을 죽일 수 있었는데 아쉽게 됐구만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삼식이 삼촌이 이 일을 계기로 더 이상 한국에 있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외국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것, 그래서 자신과 만날 수도 없고 삼식이 삼촌이 고국을 떠나야만 하는 것, 이러한 이유들로 그렇게 말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삼식이 삼촌과 김산 그리고 장한민 장군이 조사받던 시기는 516 군사 장편이 일어난 직후로 보이는데요. 그래서 잠깐 나오긴 했지만 청우회 회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결정권이 없어요.

이 말은 청우회 회장보다도 군인이 더 결정권이 높은 시기라는 말이 되기 때문에 청우회 회장은 어 자신의 것을 다 뺏으려고 했던 삼식의 삼촌이 미울 수 있지만 그에 대한 처리는 군인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장두식 장군이 그 군인들 사이에서 물론 우두머리인 박정희급은 아니겠지만 높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삼식이 삼촌을 뒤로 빼줄 만한 권력이 있었을 거라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장한민을 끌고 갔던 군인은 총 2명이었는데 삼식이 삼촌을 끌고 가던 군인은 처음에는 2명이다가 화면이 바뀌면서는 이등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삼식이 삼촌은 이런걸 왜 이등병에게 시키나라고 말하죠. 이걸 보면서 김산도 그렇고 삼식이 삼촌은 참 젊은이들에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인 거 같다라고 생각했어요. 자기는 죽을 상황에 처했는데 자기를 죽이는 일을 하는 젊은이가 너무 잔인한 일을 하게 되면서 충격에 빠질까 봐 이렇게 말하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해석에서는 이 이등병이 삼식이 삼촌을 놓치거나 삼식이 삼촌 대신 처형될 사람이라서 이렇게 말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전자이더라도 처형해야 할 사람을 돕기 때문에 이등병은 그 벌로 처형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풀어줌으로써든 자기 대신 처형당함으로써 등 어쨌든 자기 대신 죽는 인물이 될 텐데 그런 역할을 이등병에게 시킨 것이 너무 젊은 사람을 죽게 해서 안타깝다. 이런 의미로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삼식이 삼촌은 김 산이나 차태민이나 장성민 등 자기와 꽤 오랜 시간 신분을 유지한 사이가 아니면 굳이 그렇게 희생 정신을 보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이 해석이 더 이전 시기 삼촌의 성격에 잘 들어맞는 해석이라고 보여졌습니다.


일부 해석에는 모든 것이 삼식이 삼촌이 죽은 척 하는 것까지도 다 삼식이 삼촌네 계획이고 판이다라는 말도 있었는데요. 왜 자기가 죽는 판을 짰냐면, 그동안 삼식이 삼촌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판을 짰을 때는 그 계획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자기보다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파내자면 꼭 변수가 등장하고 이들이 자기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자기가 판을 짜서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죽은 것으로 가장을 하고 은퇴를 하고 자기와 뜻이 맞는 김산이 자기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강하게 마음을 다잡고 그 뜻을 다해 달려가도록 길을 열어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죠.





심지어 청우회 회장이 된 이전 회장의 막내아들에게도 자신은 죽을테니 김산은 살려달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없어도 김산의 뒤를 봐줄 회장과의 접점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청우회와 레이첼, 장두식의 힘을 입어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자신은 일본이나 어디 먼 데로 피신하여 멀리서 바라봤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삼식이 삼촌이 나쁜 사람이기는 하지만 삶이 안쓰러워서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크게 들긴 하더라구요.






아마 보고 나면 각자의 생각대로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의 바람대로 해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랜만에 너무너무 재밌는 드라마를 몰아볼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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