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는 정말 어려운 영화였다. 그래서 영화를 다루는 많은 부가적인 매체들을 엄청 봤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뒤늦게나마 오펜하이머 영화를 이해하고 있다.
책도 있다고 하는데 책도 읽고 해석본들도 더 읽고 영화를 한번 더 보고싶다. 영화에서 짤막짤막하게 나온 것들이 책의 부산물이라 책을 읽었던 사람은 반가웠다는데 나도 그러한 종류의 만남을 즐기기 때문이다.
줄거리
영화 초반부는 좀 난해하고 어려웠다. 오펜하이머의 학생시절이었는데 실험 물리학에서 다소 낙제생의 면모를 보이던 그는 향수병과,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들 때문에 심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했던 듯하다.
그래서 자신에게 무안을 준 지도교수의 사과에 청산가리를 넣어 그를 죽이려고도 하지만 다음날 바로 사과를 생각하고 달려가 아무도 사과를 먹지 못하도록 처리하는 등 위험한 생각까지 왔다갔다 하는 혼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서 그의 그런 불안을 나타내듯 점과 선이 여럿 나타나 그의 일상과 그런 우주적 장면이 교차되어 나타나는 장면이 한참 반복되었다. 이 부분을 어떤 물리학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양자를 시각화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는 우연한 기회로 자신이 잘 못하는 실험물리학 학교에서 이론물리학 학교로 옮겨 학업을 계속할 기회를 얻게된다. 그곳에서 그는 또 그 지역 물리학의 대가들도 만나고 양자역학 공부를 계속하다가 이후 미국으로 옮겨 버클리 대학의 교수직을 맡게된다.
그가 버클리 대학에서 미국에 거의 처음으로 양자역학을 알리고 가르치고 있을 때 물리학계에는 중대한 발견이 퍼지게된다.
바로 절대로 깨질 수 없는 원자가 깨지는 우라늄235에 대한 발견이었다. 이 물체의 원자는 중성자를 때려넣으면 쪼개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연쇄적으로 일어나도록 설계하면 어마어마한 위력의 폭탄을 만들 수도 있었다.
이 발견이 알려지자마자 모든 물리학자들은 이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어마어마한 폭탄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이때 마침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물리학자들은 나치 쪽에서 먼저 이러한 거대한 위력의 폭탄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폭탄이 생산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게된다. 거기에는 아인슈타인의 서명까지도 포함되어있었기 떄문에 대통령은 비밀리에 그 폭탄을 미국에서 먼저 생성하도록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하도록 한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군 쪽 캡틴은 그로브스 장군으로,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먼저 과학자 쪽 캡틴을 정하고 있었는데 좋은 소문도 많고 나쁜 소문도 많던 오펜하이머를 직접 눈으로 보고 캡틴으로 삼아도 될지 확인해보기 위해 오펜하이머를 찾아온다.
둘의 첫만남부터 오펜하이머는 그 프로젝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그 프로젝트를 진행해야할지 쭉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각 파트를 구역화해서 보안을 유지하고 철도를 깔아 중간지점에서 각 구역 결과물이 원활하게 도달하도록 하고, 중간지점에서는 그 결과물을 혼합하기 위해 상주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떨어지지 않고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아예 하나의 마을을 구성한다는 방안이었다.
그의 구상 하에 적당한 지점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위치는 로스 앨러모스. 그가 어릴적부터 외국에 가있을 때도, 그리고 돌아와서도 줄곧 사랑했던 지역이었다. 거기에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를 차리고, 그의 지인과 지인의 지인들을 모아 과학자들도 구성되었다.
똑똑하고 고집있고 각자의 철학과 주장을 가진 그들을 하나로 모으는게 쉽지 않았지만 오펜하이머는 그 일의 적임자였고 엄청난 리더십으로 그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헤쳐나간다.
하지만 영화는 단지 이 일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 일과, 이후 오펜하이머가 보안 갱신을 위한 심사를 받는 일과, 오펜하이머에게 미 원자력 위원회 산하 일반 권고 위원회(GAC)의 의장을 맡아달라고 했던 스트로스 제독이 상원의원으로의 심사를 받는 일, 이 세 가지의 일을 조금씩 교차시켜 보여주면서 이 일들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보여준다.
결말
사실 이 영화는 역사적으로 있었던 일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결말을 스포한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다만 영화에서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던, 그래서 뒤늦게 해석본들을 보면서 정확히 정리하게 된 부분들을 정리해보았다.
오펜하이머는 동생과 동생의 부인, 그리고 결혼 전 여친이자 내연녀로 연을 이어갔던 여자, 그리고 남편이 있었지만 불륜으로 만나 결혼까지 한 현 부인, 모두 공산당 조직에 있어 본인도 공산당이라는 의심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펜하이머는 GAC 의장직도 맡았고 미 원자력 위원회 (AEC) 상임 고문직도 맡았었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고 스트로스의 농간으로 인해 스파이로 몰아가기를 당해 AEC 의 기밀 문서에 접근할 수 있는 보안 인가 갱신 타이밍에 갱신을 받지 못했다.
이때 영화에 나오진 않았지만 오펜하이머의 뒤를 이어 GAC 의장직을 맡았던 라비 박사가 미 원자력 위원회와 오펜하이머 사이에서 협상안을 들고 중재하게된다. AEC가 충돌을 하다하다 오펜하이머 청문회를 열려고 했기 때문이다.
라비 박사는 청문회가 열리면 과거 오펜하이머의 행적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면서 마녀사냥을 당할것이 불보듯 뻔했기에 이것만큼은 열리지 않도록 하려고 했다.
그래서 오펜하이머가 AEC 상임 고문직을 사퇴하고 더이상 AEC 활동을 하지 않는 것, 대언론 발표를 통해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공개 사과하는 것, AEC는 청문회를 개최하지 않는 것, 오펜하이머와 AEC 간 상호 비난을 중지하고 일정 기간 후 오펜하이머는 기밀 취급 인가 허가를 자진 반납하는 것 등을 조건으로 협상을 마무리한다.
영화에서 오펜하이머에 대한 증언을 안좋게 한 사람 중 하나인 텔러는 영화만 봐도 혼자 수소폭탄을 개발하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 오펜하이머가 그를 감싸줬음에도, 학자들 사이에서 금기시 되는, 학자들 간의 등에 칼을 꽂는 행위를 한 사람이다. 거기에 유감이라며 악수까지 청하는 뻔뻔함을 보였다.
물론 이후 오펜하이머의 엔리코 페르미 수상식에서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가 그의 악수를 대놓고 거부하는 것으로 굴욕을 돌려받았지만, 가장 중요한 때에 오펜하이머 등에 칼을 꽂았다는 것에 굴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오펜하이머는 실제로 그가 악수를 청했을 때 나지막하게 "나는 방금 자네가 한 증언이 도무지 이해도 안 가고 무슨 말을 한 건지 당최 모르겠다"고 일침을 쏘기는 했다고 한다. 또 청문회 증언 이후 텔러가 학회 일로 맨해튼 프로젝트가 이루어졌던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도 사람들은 그를 보고 웅성거리며 반겨주지 않았다.
그가 자신과 함께 수소폭탄을 개발했던 동료를 발견하고 악수를 청했을 때에 그 동료도 천천히 일어나 뒤로 돌아서서 팔짱을 끼고 그를 무시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배후는 따로 있었다. 오펜하이머를 몰락시키기 위해 이 모든 일을 꾸민 사람은 다름아니느 스트로스 제독이었다. 그는 중간중간 청문회로 힘들어하는 오펜하이머를 위로해주는듯 보이는 장면도 있었기에 끝까지 정말 그가 꾸민일인지 나는 좀 의심이 됐었다.
하지만 키티는 그가 꾸민일이 분명하다고 씩씩댔다.
그리고 나도 중간에 왜 그가 오펜하이머에게 앙심을 품게되었는지 알게됐다. 영화에서 자세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전말은 이랬다.
스트로스가 원자력위원회 의장 시절 원자폭탄 연구에 예산이 많이 들 때, 예산확보를 위해 노르웨이에 동위원소를 수출할 것을 제안받았다.
동위원소는 핵분열이 되는 물질이 아니었다.
다만 항암치료에 사용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 노르웨이에서 제안한 것이었는데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 루이스 스트로스가 원자폭탄 개발 위험이 있다며 반대한 것이다.
이와 관련한 논쟁을 벌이는 자리에서 오펜하이머는 동위원소는 원자폭탄 개발 위험성이 없다고 증언했는데, 이때 단순히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 물질이 아니라고 한 것이 아니라, 망치나 샌드위치도 원자폭탄을 만드는데 사용되죠, 하면서 비아냥거리고 조롱했다.
스트로스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이상한 주장을 펼친 것도 잘못이었지만 오펜하이머가 과하게 이를 조롱한 것도 문제였다. 결국 둘은 서로의 삶의 마지막 단계에 각각 장애물이 되고 둘다 그것을 넘어가지 못했다.
후기
오펜하이머가 텔러에게 유난히 자비로웠던 것, 스트로스에겐 유난히 막말을 했던 것, 이런 것들을 두고 누군가는 오펜하이머가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을 나누어 생각하고, 대접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말년에 그는 결국 자신도 누군가의 꼭두각시처럼 원자폭탄을 만들고 그것의 사용을 막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자신이 비범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려놓은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또 그가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원자폭탄을 만들었고, 성공했을 때 이에 대한 발표장에서 일반이 혼좀 났을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폭탄 투하를 우스운 말로 경솔하게 표현했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원자 폭탄으로 인해 고통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떠올려 하는 것, 수소폭탄의 개발을 반대하고 나중에는 원자폭탄을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에 대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지 궁금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차별주의적이고 열성적이고 독선적이고 경솔했지만 동시에 죄책감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의견을 번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잘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무조건 해내고 말겠다는 생각은 젊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삶에 기회가 왔을 때 한번쯤 할법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가 점점 자신에게 주어진 무게들을 인지하고 인식하고 그것들이 누군가의 죽음과 고통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 사상과 삶을 돌아보는 사람이 되었다면, 오펜하이머는 참 입체적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바뀌지 않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자신이 정말 남들보다 월등한 두뇌와 지식과 지도력과 입지와 여러가지를 갖춘 사람으로써 누군가의 고통과 아픔에 진심으로 고민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죽음의 신이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 고백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뇌와 끝없는 자기 스스로의 논쟁과 검열이 있었을지 우리는 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원자폭탄을 만든 것이 잘한 일이었는지, 잘 못한 일이었는지는 쉽게 판단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걸 쉽게 팓난 내리는 건 역사를 가볍게 생각하는 거라는 말을, 오펜하이머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했었다.
그 말이 맞는 듯하다. 우리는 지금에 와서야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 혹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지만 우리 중 아무도 당대의 시대적 여러가지 상황, 그리고 그가 가진 지식, 지식인으로서의 무게 등을 다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역사는 그저 역사다. 배워야 할 것들을 배워야할 뿐 우리는 그들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
정말정말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였어서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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