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탄생은 방구석1열을 통해 알게된 옛날 영화다. 노래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요즘 것보다 옛날 것이 더 감성이 깊고 시적인 느낌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족의 탄생을 보면서 다시한번 했다.
가족의 탄생에서는 계속해서 우리가 기존에 알고있던 피로 엮인 관계가 얼마나 알량한지와, 오히려 피로 엮이지 않았어도 여러가지 유대를 통해 엮인 관계가 얼마나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따뜻한지를 보여준다.
처음 형철이 미라에게 나타났을 때, 대뜸 무신을 소개하고, 누나 혼자 자는 방 옆에서 큰 소리로 관계를 가지는 일이나, 누나가 만나는 사람에게 장난을 치다가 그 장난에 대한 반응이 맘에 들지 않자 무례하게 성질을 내고, 장사를 하겠다느니, 다 누나를 위해서라느니, 터무니 없는 말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런 동생이 뭐가 좋다고 미라는 눈물까지 흘렸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저럴바에는 혼자 사는 게 낫고 불편한 무신씨도 형철도 다 가버리고 혼자가 낫겠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무신의 전남편의 전부인의 딸인 채현까지 등장하자 이게 뭐하자는건가 싶고 화가났는데 그 상황에서 형철이 자기가 다 책임질테니 채현을 키우자고 하는 것을 보고 정말 영화를 끄고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미라도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니가 뭘 할 수 있냐며, 무신에게 형철도 데리고 나가라고 한다. 하지만 화면이 바뀌니 미라와 형철, 무신, 채현까지 결국 한집에 있고 그 상태에서 형철만, 잠시 술을 사러 다녀오겠다며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는지 이어 무신도 채현을 업고 대문을 나섰다. 둘을 바라보는 미라의 눈빛은 형철을 바라볼 때보다는 어딘가 따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두번째 옴니버스가 시작하는데 혼자 사는 선경의 이야기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남자가 여럿있었던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싫어하는데 한편으로는 자신만을 사랑해주기를 원하는 채워지지 못한 그런 마음이 남아있어, 엄마가 찾아오면 내쫓지만, 엄마가 아프다는 말에 한걸음에 달려가 엄마에게 짜증을 낸다.
엄마가 아프다고 알려준 사람은 엄마가 지금 만나고 있는 아저씨, 운식. 하지만 선경은 그런 운식도 싫어했다. 심지어 선경은 운식에게 찾아가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엄마를 사랑하는지 다그치기도 했는데 운식은 가족들 앞에서 선경의 엄마, 매자를 사랑한다고 말해버렸다. 사실 계속해서 이 모든 영화의 메시지가 내심 불편했던 나는 운식이 가족들 앞에서 매자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힘들테니까, 왠지 모를 고소함이 느껴졌는데, 그 순간 운식은 맞다고, 네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을 위해 가족을 파탄에 이르게 할 그의 진심을 입밖으로 꺼내놓았을까. 연극같은 결혼생활을 끝내고 싶어서였을까. 선경을 통해서라도 혹여 매자에게 상처를 주고싶지 않아서였을까. 그런거라면 가족들이 밭을 상처를 고려하지 않는 그의 사랑은 너무나 이기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끼리는 얼마나 서로가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될까. 사랑의 이면을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결핍으로 인해 내면의 아이가 다 자라지 못한 어른 선경은 아빠가 다른 동생인 경석을 곧잘 구박하지만, 경석의 유치원 운동회에 대신 가달라는 엄마에게 한바가지 짜증늘 내놓고는 운동회에 간다.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아 교실 구석에서 조용히 혼자있는 경석에게 따뜻하게 다가가 운동회에 함께한다.
운동회에서 함께 뛰면서 기뻐하고 경석을 누구보다 칭찬하고 자랑스러워하던 선경의 모습은, 저게 선경의 본성이구나, 하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언젠가 들었던 그런 대사도 떠올랐다. "나는 그 어떤 고난도 없이 즐겁게 자라 주름 한점 없는 나를 상상하며, 내 주름을 하나하나 다리미로 펴면서 산다."
선경의 성격은 사실 채워지지 못한 사랑과 의지할 수 없는 엄마와 인정할 수 없는 동생의 존재, 그리고 엄마의 남자들의 존재 때문에 수많은 주름이 생긴 탓이고, 그 주름들이 없었다면 선경도 운동회 때 보여준 해맑은 웃음을 매일 지어보이며 살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핍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마지막까지 열어보지 못했던 엄마의 가방에서 채워진다. 그 가방 속에는 엄마가 고이 간직한 선경과의 추억이 가득했다. 비로소 엄마가 자신을 깊이 사랑했음을 깨달은 선경은 펑펑 울고, 해외로 떠날 일정을 모두 취소한다.
세번째 에피소드에서 나는 왜 선경이 해외로 떠날 일정을 모두 취소했는지 알았다. 세번쨰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경석이었는데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경석이 다 자라고 나서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경석이 함꼐 살고있는 사람은 바로 선경이다. 선경은 경석을 위해 해외로의 일정을 다 취소한 것이었다. 나는 그냥 엄마의 사랑을 확인해서 취소했다고 생각했는데 경석을 책임지다니 선경은 생각보다 훨씬 따뜻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경석은 채현이라는 여자친구를 만나고 있는데 채현은 남에게 한없이 베푸는 사람이다. 문제는 꼭 남자친구가 아니더라도 힘들고 자신이 필요할 것 같은 사람에게 모두 베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늘 자신이 뒷전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경석. 늘 나무라기만 하고 툴툴거리며 그러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변하지 않는 채현이 급기야 누나와의 만남을 다른 사람을 돕느라 파토내자 경석은 채현에게 헤어짐을 전한다.
하지만 만류하던 채현도 뿌리치고 떠났으면서 다음 장면에서는 경석이 다시 채현앞에 나타난다. 처음 만났던 것처럼 기차에서. 채현은 마음을 닫고 받아주지 않으려 하지만 경석이 죽을뻔하자 달려와 꼭 안아준다.
채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친아빠도 친엄마도 떠났고 새엄마에게 혼자 힘으로 찾아왔지만 그집의 다른 아줌마가 나가라고 했던 그런 어린시절의 기억이 어쩌면 트라우마로 남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절로 마음이 반응하는 건 아닐까. 그들을 꼭 도와주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어릴적 채워지지 못한 안정감을 그런 식으로 찾으려던 게 아닐까. 알길은 없지만, 그런 채현이 왠지 엄마와 겹쳐보였을 것 같은 경석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결국 채현의 집에서 경석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안정을 찾는다. 그 집에는 무신과 미라가 살고있다. 채현은 둘을 엄마들이라고 부르고, 둘은 어느새 서로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둘이 같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무신과 채현을 바라보던 미라의 따뜻한 눈빛이 복선이었을까.
아무도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영화를 통틀어 가장 안정적인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는 무신과 미라와 채현의 집에서 경석은 미소지었고 그들이 보는 TV 속에서 선경도 미소지었다.
그리고 마치 에필로그처럼 형철이 또 다른 아내를 데리고 돌아오는 장면에서는, 무신과 결혼했다면서 저 여자와는 어떻게 결혼했을까 궁금했지만, 어쨌든 방법을 들어볼 새도 없이 무신은 문전박대를 당했다. 정말로 그걸로 끝이었다. 영화는 피가 섞인 형제는 거부하고 피가 섞이지 않은, 그러나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준 사람들끼리 가족이 되는 결론을 보여준다.
선경도 따지자면 반쪽자리 혈육인 경석을 위해 인생의 큰 방향을 틀었고 운식도 아내와 두 아들 앞에서 진정한 사랑을 토로했다. 그리고 가장 기막힌 미라와 무신, 채현. 이 셋은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서로의 어떤 매력에 반하거나 사랑으로 시작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기댈 곳 없는 세상 속 서로가 만나 조용히 서로의 빈 공간을 채워주면서 가족이 되어갔다.
가족은 엄마 아빠, 아들 딸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은 사랑하는 사람이고, 위로하는 사람이고, 위로받는 사람이고, 빈 공간을 채워주는 사람이고, 정이 든 사람이고, 그래서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다. 혹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와 다른 당신에게는 또 어떤 가족이 있을까. 가족이 점점 해체되고 공동체의 의미가 퇴색되는 요즘 시대에 다시보면 더 좋을 것 같은 옛날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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