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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키즈 / 주말 영화 추천 / 절망의 끝에서 피어난 삶

by 아셀acell 2021.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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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했다. 많은 이들이 재밌다고 말하고 실제로 유머코드도 많았고 그게 다 너무 웃기고 재밌었고 즐거웠지만 등장인물들의 속사정을 알아갈수록 그들이 추는 춤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것 같아서 짠했다.

잭슨에게 춤은 꿈이자 인생이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일본인 연인 보다도 댄스팀을 더 생각하고 고민하는 걸 보면. 그러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브로드웨이에서도 군대에서도 외면박고 무시당하는 삶에 익숙한 그는 그저 춤으로 모든 것을 체념해야하는 인생을 위로하고자 했던 것 같다.



중국인의 삶은 크게 다뤄지진 않았지만 예술혼을 억누르고 전쟁이라는 현실에 맞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사차원적인 행동들에 너무 웃기기도 했지만 필요한 때마다 말없이 따뜻하게 마음을 전하는 모습에 많이 매료되었다.

상모를 돌리던 아저씨의 삶은 아내를 찾으려는 목표로 똘똘 뭉쳐있는데 결국 아내를 만나지 못한 것이 너무 마음아팠다. 어떤 방법으로든 살아만 있어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멀리서나마 꾸역꾸역 살아가는 아내를 보며 눈물짓는 모습이 너무 마음아팠다. 그 아내는 앞부분에서 빨갱이로 몰려 돌을 맞는 여자인데, 처음에 그 장면을 봤을 때는 그 뒤에 퍼킹 이데올로기 얘기가 나오기도 했고 그래서 그냥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단순히 무기나 싸움의 명분으로 사용되는지 가장 무지하고 뭔가 본능적으로 살아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생생하고 단순하게 보여주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상모 아저씨의 아내인 걸 알았을 땐 숨이 턱 막혔다. 빨갱이라는 말에 기계처엄 돌을 들어 던지던 꼬마 아이를 봤을 때처럼.





등장인물이 애타게 찾던 사람이 죽을 뻔했다는 생각에도 그랬고 단순히 등장인물 하나에도 덜 아는 사람은 돌에 맞아도 인간적인 걱정 외에는 들지 않고 더 아는 사람, 찾아 헤매던 사람은 더 걱정되고 화가나는 마음이 들었다는 점도 반성이 되어서였다. 그런데 아내를 찾기 위해서도 또 아내 찾기를 포기하려는 마음이 들 때에도 또 아내를 찾았을 때에도 상모 아저씨가 춤을 끝내 놓지는 않았다는 점이 나는 특이했다. 아저씨는 춤이 본능이지도 인생이지도 않았지만 그에게 춤은 일종의 친구였고 위로였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해소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판례의 삶은 작가가 다른 작품에서도 보여준 바 있는 여성상처럼 똑똑하고 야무지지만 세상과 상황과 여건으로 인해 그만큼 삶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고 다만 사랑으로 가족을 그리고 다른 이들을 끌어안고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전쟁통에 여성의 삶은 백인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흑인 자신이 본인보다 팍팍하다고 인정한 것처럼 힘든 삶이지만 양판례는 그 삶에 주눅들지 않았고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고 부정적이고 염세적으로 살아가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 궁리를 찾았고 춤도 돈을 안준대도 자꾸 마음이 가니 결국 해버렸다. 상황에 치여 주어진 틀만큼만 살아가는 식이 아니라 조여오는 상황을 터트려버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냈다.





물론 그녀에게 조여오는 상황이 이겨낼만한 것이었던 게 아니었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와 같은 상황에서 그녀처럼 살아갈 수 있을지 나는 자신이 없다. 타인의 삶의 무게는 결코 보이는만큼이 아니니까. 심지어 전쟁통에 동생들을 먹여살려야하는 그녀의 삶은 어떨까. 영화에 세세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당연히 보이는 것보다 더 그리고 내가 짐작하는 것보다도 훨씬 대단한 사람일 것 같았다.

로기수의 삶은 심지어 짐작하기도 어려운, 다른 사상 속에 태어나 세뇌받고 그렇게 행동해온 삶이다. 하지만 포로가 되어 자유주의 포로수용소로 끌려왔고 자유가 허용되는 곳에서 스스로 자유를 억제하려는, 그래야만 하는 주변 상황 속에 단 하나, 춤에 대해서 만큼은 사상과 상관없이 너무나 갈망하는 인물이라서 춤을 기반으로 점차 사상에 혼란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상 때문에 증오하고 무시했던 반동분자에게는 아내를 찾으려는 간절한 사랑이 있었고 코쟁이랑 붙어먹어 살아가는 간사한 사람인 줄 알았던 양공주에게는 다른 사람을 하나하나 이끌고 포용하는 따뜻한 배려가 있었음을 알아가면서 그는 점점 춤을 배우는 데 마음을 열어갔다.





사상이 그저 같은 인간일 뿐인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색안경 노릇을 했다면 춤은 그 색안경을 벗기고 인간 대 인간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래서 후반부에 친구가 자기 할머니 때문에 반동분자 같은 짓을 해도 로기수는 그를 폭로하거나 증오하거나 하지 않는다. 왜 사상 때문에 우리 할머니가 죽어야 하느냐고 울부짖는 친구의 모습에서 그는 왜 사상 때문에 춤을 배우면 안되는가 수없이 고민했을 그의 생각, 고민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과 친구와 모두를 위해 조국이 시키는대로 할수밖에 없었던 그. 그리고 그런 그를 사랑해서 지켜낸 형. 형의 죽음을 지켜본 그. 사랑했던 단원들의 죽음을 지켜본 그.

오히려 마지막에 그가 나오지 못한 것은 모든 것을 잃고 삶만을 얻은 그가 죽었을지 살았을지 우리는 짐작할 수 없고 상상조차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기에 따라 그는 꿋꿋하게 살았을 수도 허망하게 죽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춤을 추고 싶어했을 것 같다.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그 모든 것을 걸고 했던 것이기에. 절망의 끝에서 언제나 삶은 피어나고 삶은 또 지독히도 잔인한 절망을 선사하는데도 우리는 살아간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우리의 삶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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