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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롭고 날카롭고 시리고 <밝은 밤> 최은영 지음. 🌙 오랜만에 인생 소설 책 추천

by 아셀acell 2022.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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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이런 게 읽고 싶었던 거구나.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의 애틋한 서사를 역사책마냥 담담하데 적어내려간 이 글을. 그냥 그 존재만으로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그런 위로를 읽고 싶었던 거구나.



이게 북클럽에 없어서 다른 책들을, 마치 먹고 싶은 것 대신 집에 남은 걸로 끼니 때우 듯 읽었는데 하나도 끈덕지게 마음에 달라붙는 게 없었다. 당연했다. 나는 무슨 서퍼의 이야기나 무슨 조류학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한국문학에서 내가 주로 받았던 그런 센치해지는 느낌을 받고 싶지도 않았는데, 생각해보면 그건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벽 같은 것을 그 글에서 마주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게 결코 위로가 될 수도, 희망이 될 수도 없는 이야기가 주는 벽. 나의 삶은, 나의 고통은, 이런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무의식적인 외침이 주는 답답함.



처음에는 새비 아주머니와 명희 언니, 지우 같은 존재가 되고싶다고 생각했다. 명숙 할머니와 주인공의 할머니 같은 사람. 그렇게 되기 힘들겠지,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내가 증오하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원자폭탄을 맞은 사람도, 원자폭탄을 던진 사람도, 모두 사람인 것처럼.

원자폭탄을 던지는 사람이 되지 않는 법은 간단하지만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꽁꽁 언 강을 깨부수는 것처럼 아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진정으로 공감할 줄 아는 것. 물론 이것이 누구에게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느정도로 공감하는지, 진심인지 혹은 동정인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겪은 고통을 또 겪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런 고통 없이 평안하고 무탈하기를 바란다면 그 사람에게 원자폭탄을 던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계속해서 느껴지는 기묘한 잣대가 있다.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공감할줄 모르는 사람들의 논리. 그리고 나도 평생을 그런 잣대 속에서, 짐짓 그 잣대와 나는 관련 없는 척 무시하면서도 그 잣대에 갇혀 괴로워하고, 떨칠 수 없지만 떨치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았다. 타인이 들이대는 잣대는 내가 부술 수 없기에 나는 그저 그것을 무시하고 모르는 척하고 얕보는 척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수 조차도 써보지 못하고 하릴없이 자비없는 그 잣대들에 치였고, 누군가는 더욱 철저히 그 잣대들을 스스로 대어보며 조였다. 왜 한순간도 그런 잣대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정말로 그런 잣대들에서 자유롭게 그 잣대들을 신경쓰지 않고 살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잣대들은 무시해도 때로 상처를 만들지만 나는 시간을 들여 그 상처를 치료하고 아물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진작 할 수 있게 된 줄 알았지만 사실 아직 한참 멀어서 무던히 노력중인,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는 일도 익혀가고 있다. 일말의 동정이나 우월감 없이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 우는 것.



삶이 퍽퍽해질 수록 눈물이 메말라 요즘은 그 노력이 다시 좀 퇴보하였나 싶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두세번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순수한 공감이었다. 그 순수한 공감이 나를 무장해제 시켰고 숨겨뒀던 내 소중한 감정, 사랑과 슬픔을 조금은 내보일 수 있게 만들어줬다.

아마 좋은 글을 읽는 이유가 이런게 아닐까. 읽고 나면 어떤 이유든 또 어떤 방식으로든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는 것.



기억하고 싶은 구절들 _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넌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야.’ 어느 날 말을 이을 수 없어 눈물만 흘리던 내게 지우가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할게. 이제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도 느끼며 살아.’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어떤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나는 지우를 보며 알았다.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퇴원할 즈음 할머니에게 돈봉투를 건넸다가 어색해진 적이 있었다. 내가 봉투를 내밀자 할머니의 얼굴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변하더니 다시 한순간에 명랑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러곤 애써 웃으면서 돈봉투는 집어넣으라고, 자기는 돈이 많다고 했다. 차라리 상처받은 표정으로 나를 계속 봤더라면 나았을지도 몰랐다. 할머니는 터놓고 표현하지 못할 만큼, 숨기고 싶을 만큼 내 행동에 분명 상처를 받았다. 나는 내가 돈봉투를 건넸을 때 아주 잠시 어두워지던 할머니의 얼굴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다시 웃어 보이던 할머니의 얼굴을 그해 가을 내내 떠올렸다.

그래, 똥강아지. 걔가 얼마나 감탄을 잘했는지 몰라. 작은 개구리 하나를 봐도 우와,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봐도 우와, 늘 우와, 우와, 하는 거야. 그런데 그건 너도 그렇더라. 언니를 보고 커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쩌면 우리 엄마로부터 이어졌는지도 몰라.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그렇게 감탄을 잘하니 앞으로 벌어질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받아들일까 싶었어.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우와, 하면서 살아가겠구나. 그게 나의 희망이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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